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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왕 일주

글이 아니어도 좋은 글 2

방학이 다 가는데 돌이켜보니 방학때 하고자 했던 일들을 반 정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도 않고 그렇다고 뭐 썩 나쁘지도 않다.

세상엔 너무 재밌는 일이 많은데 내가 너무 좁은 세상만 보고 사는 것 같아서 무척 답답했고 앞으로도 답답할 것 같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정보와 지식을 얻을 것인가, 어떠한 사람들을 만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는 방학이길 바랐다.

결론적으로는 썩 얻은 것이 없었다고 말하겠다.

다만 썩 나쁘지도 않았던 이유는, 어쨌든 내가 현재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로 다시 돌아갈 때 마음먹었던 것이 하나 있다.

최선을 다해 도망쳐라.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근데 막상 주제 바꿔서 글 쓰다보니 딱히 도망칠 이유는 없는거다.

글을 마치고 나니 딱히 도망 안 칠 이유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인생 최대의 위기일 수 있다. 평온함 속에 엄청난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고 느끼는 늦겨울이다.

겉멋을 많이 버리려고 했던 늦겨울인데 허세는 어쩔 수가 없나 싶기도 하고.

책 좀 많이 읽으려 했는데 다짐이 독이 되었는지 몸이 말을 안 듣는다.

그나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풍성해진다.

역시 그거다.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는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거꾸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여전히 세상은 알 수 없고 나 자신을 아는 것은 끝을 모르는 여행같은 일인가 보다.

 

얼마 전 서울미술관에 다녀왔다.

제작소 다닐 때 버스로 지나쳐만 본 곳이다.

꼭 가봐야겠다 생각은 없었는데 맘에 든 전시가 하고 있어서 가봤다.

작품들도 좋았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그 안에 있으니 우주에 있는 것 같았다. 진심이다.

미술관 밖에는 석파정이라는 정자도 있는데 겨울이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맘에 드는 작품들을 기억에 남기고 싶어서 엽서라도 사려고 찾다 우연히 질문하니 사진을 찍어도 된다길래

평소에 사진을 잘 찍지 않는 우리지만 부랴부랴 사진을 엄청 찍었다.

그러고 나서 친구 사진을 찍어주고 내 사진을 찍었다.

역시 사진은 내가 더 잘 찍는다. 그 친구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거진 내가 바꿔주고 있다. 뭐 솔직히 한 50% 정도일 것이지만.

암튼 그러고 보면 난 참 쓸모가 있는 편이다. 왜 여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그림을 보고 그림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다.

그날 친구와 대화하면서 다른 의견을 보인 작품 중 하나는 천경자의 청춘 이라는 그림이다.

나는 그 그림이 밝아보였는데 친구는 어두워보인다고 했다.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져서 도슨트한테 여쭤봤는데, 그냥 느끼는대로 느끼면 된다고, 작가는 원래 좀 우울한 일을 많이 겪으셨다고 한다.

난 궁금했다. 우울한 일을 많이 겪었어도 찰나의 감정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내 감정으로 재단하고, 나도 그러한데, 실은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느냐는 각자의 몫인 것이다.

쉽게 잊고 사는데 게다가 정말 맞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고. 왜냐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게 어쩌면 타인에 대한 방관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내가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대상들에게 내 위로가 정말 위로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던 지난날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그 친구와 에니어그램 상담소에 간 것이다.

이 상담소는 내가 알아낸 곳인데, 에니어그램에 꽂혀서 전문적으로 배우고 앞으로도 연구해나가려는 한 젊은이의 공간이다.

나보다 두어살 정도 많으신 분 같았다. 자율기부를 받고 운영하시는데 가끔씩 워크숍도 하실 예정이라고 한다.

가보니 공간은 넓지 않지만 옆에 다른 작가들 아뜰리에도 있고 분위기는 좋았다.

친구와 나는 테스트에 임했다.

나는 평소 내 친구에게 너 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종종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난 내 친구 속을 좀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우리는 부처님 앞에서도 각종 불경스러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밀하면서 오래된 사이지만, 한편으로는 나만 너무 그 친구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차다.

상담 결과까지 쓰면 너무 길어지니 안 쓰겠다. 다만 나와 사람들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도구로서 에니어그램도 썩 나쁘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무슨 소리를 쓴건지.

어쨌든 글을 남기니 좋긴 하다.

역시 새벽미사를 다녀오는 날은 쓸데없이 꼭 티를 내고 싶은가보다...^^;;

 

p.s. 기회균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요즘이다. 어떤 화두든 좋으니 나에게 던져 달라.

우리 사회의 사다리는 누가 걷어차고 있나. 사다리는 있는가. 사다리는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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