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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동호

권투장 3개월, 나는 살인 로봇이 되었다.


복싱


권투장에 다닌지 3개월이 지났다.


약정했던 기간이 끝났다. 어제 관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하직 인사를 드렸다.


아놀드 형이 연기했던 터미네이터 T-800. T-800은 죽어도 죽어도 2편, 3편까지 끈질기게 캐스팅되는 무시무시한 살인 로봇이었다. 권투를 배운 3개월, 근육을 찢어내던 시간들, 이 시간은 나를 살인기계로 만들어주었다.

'걸리기만 해봐라, 강냉이를 팝콘마냥 다 털어주마.'

내 안에선 나조차 근원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고 있다.

콸콸콸(이런 느낌이랄까)

…은 뻥이다. 3개월이란 시간은 사람을 바꾸기에는 역시 충분치 않다.


초보인 나는 ‘원투’펀치 섀도우를 바둥거리고 있었고, 고수들은 옆에서 샌드백을 쳤다. 샌드백 따위 다시 모래로 만들어주마 ‘와다다다다닥' 고수들은 눈깜짝할 펀치를 날렸다.

'......'

나는 겸손을 배웠다. 


권투를 배운 3개월, 애초 목표했던 깡따구가 아닌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3가지가 남았다.


첫번째는 줄넘기를 넘다가 얻은 생각이다.

줄넘기는 권투의 기본기를 다지기에 좋은 운동이다. 스텝의 리듬을 익히는 데도 좋고, 순발력, 심폐기능을 키우는 데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투선수들은 줄넘기를 주구장창 넘는다. 줄넘기를 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2단 넘기, 일명 '쌩쌩이'라는 것이 있다. 점프 한 번에 한 번의 줄을 넘는 게 보통이다. 쌩쌩이는 동일한 점프 값에 줄을 2번 넘는 걸 말한다. 쌩쌩이를 넘기 전엔 각오가 필요하다. 많은 체력 소모와 음속 돌파 직전의 줄넘기 채찍을 맞을 각오. 권투를 시작한 첫날 나는 쌩쌩이 4개를 넘었다.


나는 이 쌩쌩이가 ‘씽씽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빠르게 넘어가는 줄이 공기를 가르며 내는 ‘씽씽’ 소리도 듣기 좋았고, 갯수가 늘어날수록 기분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몸에 걸린 줄이 몸을 때리는 순간 

'씽씽'은 'ㅅㅂ'이 되지만 어쨌든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쌩쌩이 40개를 넘었다. 권투장 등록 두 달이 넘어가던 즘이다. 드디어. 하지만 얼떨떨했다. '어랏, 숫자를 잘못 셌나?' 성취는 때로 얼떨떨함과 함께 왔다.


두번째로 기억에 남는 건 내 망할 하체다.

내 짧은 하체는 이미 식상한 소재이다. 중/고등학교 6년, 나는 합기도를 배웠다. 합기도와 권투는 무게중심의 위치가 다르다. 발차기에 좋은 자세와 펀치에 좋은 자세가 다름에 그 이유가 있다. 권투를 시작한 첫번째 주 관장님은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동호씨는 하체 힘이 좋아서…”  '아니! 그 말씀은 제게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신인왕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하며 열심히 줄넘기를 넘었다. 푸쉬업을 했고 잽/잽/잽 연습을 했다. 하지만 내 하체는 지난 세월 합기도와 함께했던 의리를 지켰다. 발차기에만 유리한 자세를 고수했다. 내 불성실탓이 크지만, 3개월이라는 시간은 6년이라는 관성을 바꾸기엔 무리가 있었다. “동호씨는 하체 힘이 좋아서…” 3개월이 지났지만, 관장님은 내게 이 말씀을 하셨다. 도대체 이 말줄임 뒤에 무슨 말이 있을까. 쨌든 자세를 바꾼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


세번째는 동적 균형에 관한 거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부터 링위에 올라갔다. 스파링을 한 건 아니고 관장님이 잡아주는 미트를 때리기 위해서였다. 미트를 때리는 건 샌드백을 치는 것보다 더한 쾌감이 있었다. 하지만 링위에서는 링밖에서 줄넘기나 섀도우 복싱을 하는 것보다 체력이 배로 필요했다. 1라운드 버티기가 힘들었다. 왜 이렇게 힘들지? 당연히 내 얄팍한 체력이 문제겠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내 자세가 잘못된 건가. 관장님께 물어보았다. 관장님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셨다. "움직이니까 그렇죠."

아, 그렇구나. 움직이는 목표를 쫓아서 그렇구나.


...

어제 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물건들을 챙겨서 돌아왔다.

그리고 집앞에서 줄넘기를 넘으며 지난 3개월을 생각했다.


내게 권투는

얼떨떨함을 이해해가는 것이었고,

변곡에 변곡을 더해가는 것이었고,

목적은 변하지 않지만, 목표는 변한다는 걸 아는 것이었다.


내 삶도

변곡에 변곡을 더해가며,

얼떨떨의 의미를 깨달아가며

목표를 향해.

때론 글을 읽고

때론 글을 쓰며.